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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

2010/07/13 00:08 from go

개망나니 폭군이 아닌 이상, 왕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을 거다.



컨테이너는 정말 덥다. 파리가 하나 붙어 있는 천장은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벽지가 우그러들어서 울퉁불퉁하다. 이 두평 반만한 공간에 침대는 누가 보기에도 사치다. 문을 열어 보이는 건 답답해 보이는 검은 옷장, 그리고 침대 뿐이다. 저 옷장도 자리를 한껏 차지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랄 것도 없지만 어쨌든 짧았던 부티나는 시절을 초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철지난 옷장. 침대는 내가 열살 쯤 부터 써오던 거다. 매트리스를 한번도 갈은 적이 없다. 어느 한 구석엔가는 촛불을 들고 탐험을 한답시고 기어 들어가서 커다랗게 녹아 내린 자국도 있다. 가운데가 움푹 꺼졌다. 나는 그 속으로 계속해서 꺼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턱에 땀이 배어서 흐르고 있지만 뭐 하나 까딱 하는 것도 귀찮다. 창문 세 개를 다 열어도 텁텁한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얼굴 주변에서 떠나가질 못한다. 꼭 내 주변의 공기만 정체되어서 아주 아주 천천히 흘러다니는 것 같다. 몸이 느려진다고해서 전기 신호가 덩달아 느려지는 것은 아닐텐데, 나는 매우 느리게 생각하고 있다. 내 뇌에서 이뤄지는 전기 반응이 눈으로 보인다면 평소엔 파직파지직- 적당이 흘러갔다 치면, 지금은 가끔가다 스파크가 튀는 정도 일거다. 그것도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왕은 뭐든지 다 가질 수 없었다. 특히나 왕이라서 더욱 그랬을 거야......이유를 달고 싶은데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아주 천천히 생각이 흐른다.


매미가 쌔액 운다. 쌔액쌔액 우는 것은 쓰르라미인가? 어쨌든 엄마의 지론은 그렇다. 여름은 아무 때나 덥지 않는거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특히 저놈이 울기 시작하면 진정으로 더위를 먹는 거라고. 


천장에 붙은 파리는 미동도 않는다. 저놈은 왜 여기 붙어 있을까. 뇌가 익어버릴 것 같이 찌는 이 철상자 속에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마 파리가 보고 있을 나도 그럴꺼다. 저년은 뭐하러 저기 푹 꺼져있을까. 무슨 득이 된답시고.


왕이 지나치게 친절한 드라마를 봤다. 난 그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봐야만 했다. 틀어놨으니까.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말은 안해도 자라고 한다. 소리로 만들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이 있다. 난 소심하게 잘 따르는 편이다. 그 앞 뒷 내용 파악 안되는 드라마는 대뜸 내게 이런 바보 같은 왕을 보여줬다. 여자 마음을 하나 얻질 못해서 전전긍긍 하는 어떤 놈을 말이다. 


왕이 취하고 싶은 것을 다 취했을까? 왕이란 성왕이 되라고 어렸을 때부터 하도 독촉, 재촉, 협박, 회유....갖가지 것들을 당한 인간이기에 매력은 없어도 매너나 인내심 하나 만큼은 끝내줬을 거다. 조기교육은 무서운거다. 난 어렸을 적에 구사했던 언어를 지금도 완벽하게 해낸다면 대동강물 파는 봉이 김선달 쯤이야 껌처럼 씹어 뱉을 수 있을 거라 자부한다. 어릴 때 배운 것이 점점 쇠하긴 해도 나를 차지하는 큰 부분인 것이 분명하다.  내 경우는 그렇다. 그리고 어릴 때 배운 가치관들은 무섭도록 날 쥐고 흔든다. 가끔 교육이 만들어 놓은, 본성과는 다른 나를 볼 때마다 우뚝 멈춰서서 놀라고는 한다. 내게 이런 양극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세뇌교육의 잔재들. 뭐 내 이야기일 뿐이라고 비웃더라도 난 왕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놈들도 인간이잖아. 


그 왕은 참 착하게 군다. 마음 못얻어낸 여자. 그 여자 입장을 오래 헤아리고 앉아있더군. 유교의 사상이 가득담긴 가방끈이 길고 길었던 왕에게,  타인에게 함부로 구는 일은 지금 까지 배워온 세계를 헤치고 찢어 발기는 무시무시한 행위였을 거다. 나는 요즘에서야 어렴풋이 그 기분을 안다. 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 어쩌면 내 손으로 벽을 무너뜨러야 할 때의 공포.





왕도 제 멋대로 굴려면은 공포에 떨면서 제 세상을 무너뜨려야 했는데. 내가. 이렇게 왕을 비웃고 있더라도, 이런 내가. 오랫동안 배워오고 잘 쌓아온 것들을 무시하고 망나니 폭군마냥 가볍게 선을 넘어갈 수 있을까?


그 동안 변화를 무릅쓸 줄 알았던 과거의 현재의 위인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고 싶다.  "약이라도 해야하는 걸까. 어떻게 해서 넌 그렇게 무심해 지는 거냐." 너희들에게도 변화는 분명 나만큼 커다랗고 숨막히는 덩어리 였을텐데. 이걸 어떻게 실행한 것이냐고.


개망나니를 보면 끌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쁜놈, 개새끼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무서운 일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선, 나의 선한 가치, 내가 배워오고 알아왔던 세계를 부수고, 내 손으로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이제 다섯시 즈음 되었으려나. 여전히 나는 푹푹 가라앉고있다. 
그리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홀로 떨쳐내야 했던 왕을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 나는 지금 처참하다.  
Posted by 크루시아레 트랙백 0 : 댓글 0